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계로문사귀신. 자왈, “미능사인, 언능사귀?” 왈, “감문사.” 왈, “미지생, 언지사?”
계로(자로)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잘 섬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는가?” (계로가) 말하기를 “감히 죽음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삶을 모른다면 어떻게 죽음에 대해서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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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 사(섬기다)
未 미(아직 ~아니다)
焉 언(어찌~인가?)
敢 감(감히, 함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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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로(季路)는 공자의 제자인 중유(仲由)의 자(字)입니다. 흔히 자로(子路)라고 불립니다. 공자보다 아홉 살 적었고, 제자 가운데서는 최고 연장자였다고 합니다.
추석이 되면 조상께 예를 다하기 위해 모두가 분주해 집니다. 특히 음식을 만들고 차례상을 차리느라 정신이 없죠. 온 가족이 모여 조상에게 감사하며 차례를 지낸다는 것은 큰 기쁨이 있는 의미심장한 일이지만, 이런 명절을 치르며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법에 따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죠. 이런 일이 생기면, 이런 제례를 강요해 온 유교와 그 시조인 공자를 (속으로) 욕하는 경우도 더불어 생기게 되죠.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공자는 (조상)귀신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보다는 살아가는 현실, 직면한 현실이 훨씬 중요해 보입니다. 많은 종교가 관심을 갖는 내생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죠. (그래서 유교를 과연 종교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도 서양의 종교학자들 사이에서는 종종 일어났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따라가는 관혼상제(冠婚喪祭)에 대한 예식은 고려 충렬왕 12년(1286년) 안향에 의해 원나라에서부터 주자학이 소개되며 함께 전래된 “주자가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이 개국하며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고, 억불숭유정책을 펼칩니다. 왕실과 고관대작 등의 상류층에서 불교적인 의례가 점차 사라지고, “주자가례”의 예법이 대신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나서는 일반 백성들도 상당부분 유교적 의례를 따라가게 됩니다. 불교식 ‘화장법’과 같은 상례는 17세기부터는 승가를 제외하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고요.
그리고 이 형식적인 주자가례의 예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불거졌던 조선시대의 유명한 정쟁이 바로 예송(禮訟)논쟁입니다. 핵심 안건은 (우리의 눈에는 진짜 하잘것없어 보입니다만 아무튼)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생존해 있는 친모(親母)나 시모(媤母)는 몇 년간 상복을 입어야만 하는가”였습니다. 아마 그 시대에는 이런 부분이 잘못되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린다 생각했었나 봅니다. 사실 이 예송 논쟁은 ‘상례’에 대한 성리학적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논쟁이기도 했지만, 실은 서인과 남인 사이의 권력 다툼이었죠. 이렇게 본다면, 사실 이 논쟁은 성리학적인 “해석” 그 자체보다는 정치적 “이용”이라는 목적이 훨씬 더 강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권력욕이란… 추하죠.)
가족단위로 와도 흔히 차례상을 어떻게 차릴 것인가로 설왕설래하는 모습을 보신적이 있으시죠? 이럴 때 유용한 상식이 바로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柿),’ 그리고 ‘어동육서(魚東肉西)’와 같은 표현입니다. ‘홍동백서’는 제사 때, 과일을 놓는 순서로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는 뜻이고, ‘조율이시’란 대추, 밤, 배, (곶)감의 순서로 제사상에 놓는다는 뜻이다. ‘어동육서’는 짐작하시겠죠. 생선은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놓는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언제 어디서 이런 내용이 비롯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사소한데 목숨을 걸 이유는 없을 겁니다. (다만 전통과 관습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니… 실천은 각자의 판단과 결단에 따라서…)
작년에 이어 이번 추석도 코로나로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아졌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공자님의 말씀을 한 번 더 새겨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힘써 잘 모신다 한 들,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게 잘하지 못한다면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좋은 명절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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