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善若水 상선약수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노자_도덕경_8장).
오늘도 도덕경의 한 구절을 읽겠습니다. ‘상선약수’라는 말은 아마 도덕경을 이야기하며 ‘도가도비상도’와 더불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구절일 것입니다. 그제 판본에 대해 말씀드렸으니 오늘도 본문을 먼저 확정하고 읽겠습니다. 흥미롭게도 ‘곽점본’에는 오늘 본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백서본’과 ‘왕필본’에 있는 본문을 가져와야 하는데 글자의 차이는 있지만 의미는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익숙한 ‘왕필본’을 인용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상선약수).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으며(水善利萬物而不爭 수선이만물이부쟁),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비천한 곳에 자리 잡는다(處衆人之所惡 처중인지소오). 그래서 道에 가깝다(故幾於道 고기어도). 거할 때에는 땅처럼 낮은 데에 처하기를 잘하고, 마음 쓸 때에는 그윽이 깊게 하기를 잘하고, 사물과 더불어 할 때에는 어질게 행하기를 잘하고, 말할 때에는 믿음직스럽게 하기를 잘하고, 바로잡을 때에는 다스리기를 잘하고, 일을 할 때에는 능숙함을 펼치기를 잘하고, 움직일 때에는 때를 맞추기를 잘한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않으니 이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夫唯不爭 故無尤 부유부쟁 고무우)”
若 약(같다), 야(반야)
爭 쟁(다투다)
處 처(곳, 처소; 때, 시간)
衆 중(무리)
惡 오(미워하다) 악(악하다)
幾 기(몇; 얼마; 거의; 가깝다)
번역은 ‘동양고전DB’에서 가져왔습니다.
그렇다면 백서본에는 어떻게 쓰여있을까요? 궁금하시죠! 백서본은 ‘갑본’과 ‘을본’으로 나뉘는데, ‘상선약수 上善若水’라는 표현이 갑본에는 ‘상선사수 上善似水’라고 되어 있고, 을본에는 ‘상선여 수 上善如水’ 라고 되어 있습니다. 같을 ‘여如’에 닮을 ‘사似’이니 의미는 같죠. 또 ‘수선리만물이부쟁不爭’의 마지막 두 글자가 ‘유정有靜’ 즉 ‘고요함이 있다’ 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본을 원래대로 번역해 보면,
“최고의 선은 물과 같으니 물은 만물을 편리하게 하므로 고요함이 있다.” (백서본)
“최고의 선은 물과 같으니 물은 만물을 편리하게 하지만 그들과 다투지 않는다.” (왕필본)
다른 구절도 표현상의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높은 곳에 있다가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물은 늘 아래를 향해 흐르지요. 장애물이 있으면 옆으로 돌아가고, 구덩이가 있으면 찰 때까지 쉬었다가 자연스럽게 아래로 아래로 갈 길을 계속 갑니다. 다툼이 없도록 늘 양보하지만, 해야 할 바를 결코 잊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 내려가는 물의 덕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실 도덕경에는 너무나 좋은 구절이 많습니다. 오늘 읽은 ‘상선약수’만 해도 그렇죠. 하지만 이게 가장 오래된 판본에 없었다고 생각하면… 있지도 않았던 이 구절에 그토록 큰 감명과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도대체…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인 저도…)라는 생각에 화풀이나 해 보려고 합니다. ^^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최근 국내 학자들에 이루어진 연구업적에 무지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한글로 된 중국고전에 대한 저술들을 읽을 때 가장 아쉬운 것은 비평학적 방법을 사용한 연구들을 국내에서는 거의 볼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그런 연구를 반영한 글들도 대중적인 저작 수준에서는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나은 경우는 자신이 번역, 해설하는 판본을 선택한 이유를 밝히는 경우죠. 사실 그런 학문적이며 다분히 전문적이며 영역에 대한 글이야 시장성이 없을 것이 뻔하니 거기까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일반 대중들을 위해서라면 뭐 필요가 필요가 없을 것 같기는 합니다.)
도덕경의 판본이 여럿이라면 (1) 이렇게 다양한 본문들을 통해 원본을 확정하는 시도도 해 보아야 할 것이며(본문비평/Text Criticism), (2) 본문간 글의 스타일간에 차이점은 없는지, 내용상의 정합성은 있는지, 그런 차이가 생겼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저자가 하나인지 여럿인지에 대해 판단해 보아야 할 것이고(문학비평/Literary Criticism) (3) 경전의 내용을 최초로 들었던 청중들은 누구였고 어떤 삶의 자리에서 어떤 형식으로 이 내용들이 발화되었는지(양식비평Form Criticism), (4) 어떤 집단이 이러한 내용을 (기록되기 전까지) 구두전승으로 간직해 왔는지(전승사비평/Tradition Criticism), (5) 어떤 역사적 사회적 상황 가운데 전승의 내용이 가감, 배열되어 최종 형태에 이르렀는지(편집사비평/Redaction Criticism) 등등에 대한 엄밀한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 본문의 ‘상선약수’가 곽점본에 없었다면, 위에서 말한 비평학적인 접근을 통해 언제, 어떤 맥락에서, 어떤 청중들을 위해 이 구절이 등장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부분을 설명하고 나서 (도덕경을 주석하는 학자라면) ‘상선약수’라는 이 구절을 자기가 주석하는 본문에 넣을지 말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상선약수’라는 구절이 원래는 없었지만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넣겠다든지 아니면 빼겠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이런 본문의 확정과 그 본문에 대한 개인적인 번역, 그리고 해설을 통해 그 학자가 가지고 있는 본문에 대한 최소한의 학문적인 입장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사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근대 서양의 성서비평학에 적용되어 온 방식입니다. 사용할 수 있는 자료나 추적할 수 있는 역사적 사료의 범위가 다르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방법론은 충분히 동양학에도 적용할 수 있지만 - 서양에서 동양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굉장히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 아직 우리나라의 학계에 적용되기까지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 합니다. 사실 동양고전에 이런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이 정당한가도 한 번 고민해 볼 필요도 있을것 같구요.)
우리가 이런 경전을 접할 때 흔히 보고 듣는 말이 소위 ‘주석 註釋(혹은 注釋)’이라는 표현입니다. ‘주석’은 사전적으로는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자세하게 풀이’하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위키백과는 이 단어의 두 가지 쓰임새를 구분하는데요, 첫째는 ‘본문의 뜻을 알기 쉽게 풀어 쓰는 것’이고 둘째는 ‘종교적 본문을 비평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주석’에 해당하는 단어 가운데 흥미로운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비롯된 “엑세지시스 exegesis”라는 단어인데요, 단어의 의미 자체가 (책으로부터) 밖으로 끄집어 낸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텍스트로 들어가 읽고 싶은 것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대한 이해는 본문 자체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주석은 본문에 대한 언어학적, 사회적, 역사적, 사상적 배경에 대한 철저하고도 충분한 이해가 앞서야 합니다. 그러니 한 명의 학자가 해 낼 수 있는 일은 아니고 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죠. 그리고 이런 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나서 그 결과물이 나와야 ‘본문에 대한 적용’이라는 말이 의미를 갖게 됩니다. 본문에 대한 이해가 틀어졌는데 그 내용을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죠.
이렇게 본다면,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도덕경과 관련된 서적이나 강의들은 (심하게 말하자면) 본문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그에 따른 ‘적용’이 아니라 본문을 ‘이용’내지 ‘남용’하기 위해 독자에게 ‘이해’를 강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도덕경의 구절을 가져다 쓴 것이죠.
(이런 점에서 지난 번 “視素保樸 少私寡欲 시소보박 소사과욕” 편에 잠깐 소개해 드린 ‘노자독법’을 쓴 김권태 씨의 ‘왕필주’ 선택의 변은 그 책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기는 했지만, 사실 현대의 철학사조나 문학이론을 보면 ‘이해’와 ‘이용’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해석의 한계 내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중 하나만 골라서 ‘이것이 맞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원본과 최근까지 이루어진 학문적 업적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로서는 전문가들의 글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데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이 세대가 지나고 또 지나도 같은 이야기만 반복한다면… ‘도대체 전문성을 어디서 찾아야 하나’라는 생각이(라고 쓰지만 사실 사소하게 짜증이) 났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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