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非奉我 我胡爲喜 原非侮我 我胡爲怒 원비봉아 아호위희 원비모아 아호위노
원래 나를 받드는 것이 아니니 내가 어찌 기뻐할 것이며, 원래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니 내가 어찌 성낼 것인가 (채근담_전편_172)
채근담에 나오는 또 다른 지혜로운 구절입니다.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내가 귀하여 남이 나를 받드는 것은 이 높은 관과 넓은 띠를 받드는 것이요,
(我貴而人奉之 奉此峨冠大帶也 아귀이인봉지 봉차아관대대야)
내가 천하여 남이 나를 업신여기는 것은 이 베옷과 짚신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我賤而人侮之 侮此布衣草履也 아천이인모지 모차포의초리야)
그런즉 원래 나를 받드는 것이 아니니 내가 어찌 기뻐할 것이며,
(然則 原非奉我 我胡爲喜 연즉 원비봉아 아호위희)
원래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니 내가 어찌 성낼 것인가!
(原非侮我 我胡爲怒 원비모아 아호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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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 봉(받들다)
峨 아(높다; 높게하다)
冠 관(갓, 관)
帶 대(띠)
賤 천(천하다; 천히 여기다; 경멸하다)
侮 모(업신여기다; 조롱하다)
布 포(베; 펴다; 베풀다)
履 이, 리(밟다; 신을 신다; 겪다)
原 원(언덕; 근원; 근본)
胡 호(어찌; 되<약 1.8리터>; 오랑캐 이름; 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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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을 읽어보니 어떠세요?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이건 완전히 육체이탈 화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남이 나를 업신여겨도 본연의 나를 업신여기는 게 아니니 성내지 말고, 남이 나를 받든다 해도 본연의 나를 받드는 것이 아니니 기뻐할 필요가 없다. 설득력이 있죠! 그러니 충분히 받아들일 만 하죠.
‘옷과 신발’이야 그야말로 겉치레이니 오늘 채근담의 지혜처럼 무시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내 몸과 그 행동으로 인한 비난이나 칭찬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즉, 누군가가 ‘나의’ ‘어떤 것’때문이 아니라 그냥 행동으로 드러나는 ‘나’를 받들거나 혹은 무시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자라면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더 인격수양에 정진을 해야 할 것이고, 후자라면 자기성찰을 충분히 한 후에 역시 인격수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식의 흐름으로 보자면 오늘 구절의 최종 결론은 ‘남의 말에 팔랑거리지 말고 언제나 신독의 자세로 자기수양에 힘쓰자’가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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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입니다만, 이 글을 읽다가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이며 극작가이고, 음악비평가이기도 했던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의 재미있는 심신구별법이 생각났습니다.
서양 철학은 크게 유심론과 유물론으로 나뉩니다. 유심론은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정신적인 것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이고, 유물론은 정반대로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된다는 입장입니다. (아마 오늘 본문에 있는 채근담의 입장은 서양인들의 입장에서는 유심론적인 철학 전통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우리의 언어사용법을 예로 들며 정신과 육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합니다. (본문의 표현을 가져와 설명하자면) ‘내 옷과 신발’이라는 표현에서 ‘옷과 신발’은 ‘나’가 ‘소유한 것’이지 ‘나’는 아니죠. 그러니 본래의 ‘나’를 알기 위해서는 ‘옷과 신발’은 제외해야 하겠죠. 여기서 조금 더 나갑니다. ‘내 팔과 다리’에서 ‘팔과 다리’ 역시 ‘나’는 아니고 ‘나’가 소유한 무엇이죠. 그러니 본질적이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머리’도 떼고, ‘몸통’도 떼서 결국 우리가 신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를 이해하기 위해 없애 버립니다. 그리고는 묻죠. 그럼 모든 것을 없애고 난 뒤에 남는 ‘나’는 뭔가? 아니 뭐가 남긴 남은 것인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답에 따라 오늘 본문에 대한 자세도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튼 이런 난제를 제시한 후에 마르셀은 위와 같은 식으로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하며 ‘육체화된 정신’이라는 개념을 확립하고 자신의 철학을 시작합니다.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나’ 혹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는 [명제인지 선언, 아니면 화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데카르트의 주장에서 그 입장이 잘 나타납니다. 데카르트 이후 서양 근대철학자들은 절대 다수가 데카르트의 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르셀의 이와 같은 생각은 사실 그리스도교의 예수탄생에 대한 성서의 서술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을 “육체화된 말씀”이라고 보면 이건 “육체화된 정신”이라는 마르셀의 개념과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사실이 그렇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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