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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삶

022_Gitanjali/35 by Rabindranath Tagore(1861~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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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타고르의 시를 한 편 소개해 드릴까 하는데요, 소월에 이어 타고르로  이렇게 앞으로 몇  더 영어로 번역된 외국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920년대 한국에는 많은 번역시가 소개됩니다.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시가 우리가 읽은 Had I heavens embroidered cloths를 포함해서 17편, 독일시인 하이네의 작품이 23편, 그리고 러시아 투르게네프의 시가 33편 번역이 되어 소개됩니다. 어느 시인이 당시 문단의 사랑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동방의 등불 잘 알려진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가 당시에 무려 108편이나 번역이 되었다고 하네요. 타고르가 그 시절 한국문학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나타내 주는 지표라고 볼 수 있겠죠. 사실 무리도 아닌 것이 타고르는 19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동양인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드높이고 있었거든요. 

 

오늘 소개해 드릴 시는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Gitanjali, 신에게 바치는 송가) 에 실린 35번째 시입니다. 원래는 인도 벵갈 지역 방언인 벵갈어로 쓰였던 것이었는데, 그 중 여러 편을 선별해서 영어로 번역해 1912년 영국에서 출판한 시집입니다. 

 

Gitanjali/35 

     by Rabindranath Tagore  

 

Wherethe mind is without fear and the head is held high; 

Where knowledge is free; 

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Where words come out from the depth of truth; 

Where tireless striving stretches its arms towards perfection; 

Where the clear stream of reason has not lost its way into the dreary desert sand of dead habit; 

Where the mind is led forward by thee into ever-widening thought and action 

Into that heaven of freedom, my Father, let my country awake. 

 

기탄잘리/35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펴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자유의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내 아버지여, 내 조국을 일깨우소서 

 

************************ 

 

그리고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동방의 등불이라는 타고르의 시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펴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09546&cid=40942&categoryId=32966  

 

동방의등불

인도의 사상가이자 시인 겸 극작가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1861~1941)의 시.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

terms.naver.com

 

비슷한데 묘하게 다르죠? 사실 타고르가 쓴 시 가운데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는 없습니다.

 

이 시는 사실,

 

(1) 기탄잘리 35앞부분에,

 

(2) 일제치하에서 억압받는 우리나라 사람을 위해 남겼다는 타고르의 유명한 메모(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를 앞 4행으로 붙이고,

 

(3) 기탄잘리 35의 마지막 행을 2행으로 바꾸고 파격적으로(라고 쓰고 낯뜨겁게라고 읽습니다) 개역을 해서 탄생한 시였거든요.

 

교과서에 실려 모든 국민에게 읽힌, 우리가 너무나 애송해 온, 바로 그 시가 사실은 무지와 오해, 의도적인 왜곡의 결과였다고 하면 에구 이에 대해서는 많은 글들이 쏟아졌는데, 아래의 두 기사가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6437  

 

조선은 과연 동방의 불빛이었나? - 교수신문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동양인’이자 인도의시성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는 한국인들 에게 특히나 친숙하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에게 써 줬다는 메시지가 그 이유이다.“일

www.kyosu.net

http://dongne.donga.com/2009/12/21/d-story-32-%ED%83%80%EA%B3%A0%EB%A5%B4%EC%9D%98-%EC%8B%9C%EC%99%80-%EA%B4%80%EB%A0%A8%EB%90%9C-%EC%98%A4%ED%95%B4%EB%93%A4/  

 

D-story 32 : 타고르의 시와 관련된 오해들 |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동아일보 지상(1929년 4월 2일자)을 통해 전해진 타고르의 시는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인지 잘못 알려진 것들이 꽤 있습니다.   먼저 동아일보에 실린 넉 줄의 ‘동방(東方)의 등

dongne.donga.com

 

물론 타고르에게는 아무 잘못이 습니다.^^ 

 

그럼 다시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로 돌아가 보죠. 이 시집의 서문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예이츠(W. B. Yeats)가 씁니다. 거기서 예이츠는 (타고르와 같은) 인도 벵갈 출신의 한 유명한 의사와 나눈 대화를 인용합니다. 그 의사에 따르면, 타고르는 삶을 부정하지 않고, 삶 그 자체로부터 소리를 내지른 인도 최초의 성인이고, 그게 인도인들이 그의 시를 사랑하는 이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의사가 말한 부분의 종교적 문화적 맥락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인도인들의 수천 년의 고뇌가 들어 있거든요. 

 

인도에서 비롯된 세계종교가 둘 있습니다. 힌두교와 불교입니다. 그래서 이 둘은 같은 사상을 공유합니다. 그건 바로 윤회(samsara, reincarnation)와 해탈(nirvana, moksa)이지요. 윤회란 삶이 끝나지 않고 되풀이 되는 것, 즉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해탈이란 영원히 되풀이 되는 삶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진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죽음은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지는 과정일 뿐, 해탈에 이르기 전에는 진정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게 굉장히 재미있는 상황을 만들어 냈는데요. 서양인들에게 익숙한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유일신교에서는 이 세상은 한 번으로 끝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후의 세상은 천국에서 맞이한다는 약속이 너무나 강력하지요. 그리스도교인들 인도에 도착해서 그들을 전도하려 했을 때, 전혀 통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세계관의 차이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했을 때, 인도인들은 그게 바로 문제인데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고 문제 자체가 답이라니 이게 무슨 신박한 헛소리인가 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예수는 신의 아들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 그 얘기, 나도 알아. 그건 비슈누(인도의 최고신 가운데 하나입니다)의 여덟 번째 환생인 크리슈나 말하는 거잖아 이런 식으로 또 다른 삶, 혹은 영생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해결책이 아닌 문제점이었고, 축복이 아닌 저주였습니다. 그러니 통할 수가 없었죠. 

 

그리스도교의 핵심개념이자, 프랑스 혁명 이후 근대국가의 핵심가치로 등장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라는 개념도 인도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을 한번 살아야 인간이라는 존재가 모두 존귀한 것이라는 주장이 의미가 있을 텐데, 여러 번 살며 전생에 축생이었거나 고귀한 신이었을 수도 있는 존재가 지금 여기 인간으로 함께 모여 있고, 내생에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지 모르니, 딱히 인간만을 특정해 존엄하다고 이야기하는 게 무의미한 거죠. 

 

또, 이 세상에서 우리가 평등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끝나면 다시 평등을 구현할 기회가 없다고 믿기 때문일 텐데, 인도인들에게는 셀 수 없이 겪은 전생과 지금의 현생, 그리고 셀 수 없이 겪을 내생을 포함해서 전체적인 관점에서 판단해야만 제대로 된 평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었죠.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평등은 위계질서로 표현됩니다. 전생에 왕자였지만 나쁜 업을 쌓아 현생에는 노예로 태어난 그와, 전생에는 그의 노예였지만 좋은 업을 쌓아 현생에서 공주로 태어난 그녀는 나름 평등한 것이죠. 

 

(사실 전생이 뭐였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문제인데, 이런 세계관을 받아들이면 지금 내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그건 전적으로 내 탓이라서 순응하고 살 수 밖에 없다는 숙명론이 만들어집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바꾸는 일은 뒷전이 되는거죠.) 

 

아무튼지 간에, 삶 그 자체가 궁극적으로는 벗어버려야 할 업보였기 때문에 이들의 구원은 궁극적으로는 윤회하는 삶을 벗어나는 것, 즉 완전한 소멸(죽음)에 이르는 것이 됩니다. 이게 바로 해탈의 본래적 의미죠. 이런 세계관에서 이라는 것은 결국 해탈에 이르기 위해 부정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 윤회의 씨앗을 담은 부정적인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한 시인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타고르가 얼마나 신선했을까요? 얼마나 희망적이었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붙들고 싶었을까요? 

 

이게 의사의 짧은 한 마디에 포함된 수천 년에 걸친 인도인들의 숙명적인 고뇌였고, 타고르가 그들에게 갖는 의미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인도문화를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크게 보면 그렇다는 거죠.) 

 

여담이지만, 타고르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인도로부터 기증받은 타고르 흉상이 서울 대학로 혜화역 1번 출구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4줄 메모와 함께요. 혹시라도 대학로에 가실 일이 있으시면 한번 보고 오세요.^^ 

 

https://blog.naver.com/roaltlf/141104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