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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하는 삶

172_道可道非常道 도가도비상도 (도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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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可道非常道  도가도비상도 (도덕경)

 

어제의 구절 가운데 진리가 외적으로 완전히 드러난다면 이것은 진리가 아니며, 말로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긴다라는 내용은 노자 도덕경의 첫 구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구절은 모두가 한 번은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 그런데 번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조금 까다로운 문제가 있어서 그냥 세 분의 번역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고르시면 됩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신지는 모르겠는데 1999년으로 기억하는데, 그즈음 도올 김용옥 선생이 EBS에서 노자와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늘 그렇듯이 도올의 강의는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았고 책으로도 출판되며 노자에 대한 붐을 일으켰습니다. 그 강의에서 도올은 도가도비상도를 이렇게 번역합니다.

 

도를 도라고 할 수 있다면 그 도라고 말하여진 도는 항상 그러한 도는 아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B8XSInl3GI&list=PLM79DZYYdoYMT16hmcBnldC5Wm6LOaYon&index=11

 

그런데 호평일색이던 도올의 강의에 딴지를 크게 거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온라인으로 도올의 강의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올리다가 급기야 그 글을 모아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을 출간한 이경숙이라는 정체불명의 작가였습니다. (책이 출판되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신문과 인터뷰를 했기 때문에 지금은 누군지 알려 졌지만 그 당시에는 책을 출판하던 출판사 직원들조차도 온라인으로만 작업을 해서 인적 사항을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언론과의 인터뷰는 일절 없었구요.)

 

 

여기서 노자를 웃긴 남자는 당연히 도올을 말합니다. 이 분은 자신의 책에서 도올의 첫 구절 번역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조금 길게 인용하겠습니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네. 시작부터 황당해서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저런 소리를 보고 뭐라 그러는 줄 아냐? 바로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 라 하는 거다. 첫줄부터 삼천포로 빠져버리니 끝에는 어디로 가겠어? 하기사 이게 도올의 죄겠냐? 도올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칭송해 마지않는 왕필이부터 현대 중국과 대만일본을 비롯 조선 핫바지 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자의 대가들이 한결같이 내놓은 해석이다. 원래 독창성이나 창의성은 별로 봐줄 게 없는 두뇌를 갖고 태어난 도올인지라 뭐 별다른 해석을 할 방법이 없었을 거다. 그저 전부 그렇다 하니까 자기도 그렇게 강의했을 뿐이겠지. 이게 평범한 학자의 강의라면 봐주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칭 동양학의 대가요, 노자를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고 뻥을 치는 인간이 이런 것도 바로잡지 못하면 지 자랑이 얼마나 무색한 것이냐 말이다.

 

(중략)

 

만약에 저 번역이 맞다고 치면 노자의 작문이 엉터리가 되는 것이야. 저 말을 한문으로 쓴다면 '도왈도 도비도' 가 되지 '도가도 비상도' 가 될 수 없는 거야. 노자는 문장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구사하는 사람이지 애매하고 모호하게 적는 스타일이 아냐. '' 자는 '무엇을 할 수 있다' '해도 좋다' '가하다' 는 의미를 가진 글자다. 그래서 '도가도' 라는 말은 '도를 도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 라는 뜻이다. 그리고 '비상도' 는 하지만 언제나 도라고 할 필요는 없다'가 된다. '도를 도라고 불러도 좋지만 꼭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소리다. 이 첫 문장은 노자가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무엇에 대해서 이름을 '' 라고 붙인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자기가 지금부터 그것의 이름을 '' 라고 하기는 하지만 꼭 그것의 이름이 ''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후대의 엉터리 학자들이 그 말을 못 알아먹고 2천 년 동안 헛소리만 해온 거라. 이름을 '깨달음' 이라 해도 좋고, '섭리' 라 해도 좋고, '법칙' 이라 해도 좋다는 말이다. 그냥 이름을 붙이다 보니 '' 라 했을 뿐이니 이름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지 않는가 고민하지 말라는 친절한 설명이다.”

 

이 분은 오늘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도를 도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언제나 도라고 할 필요는 없다.”

 

도올 선생의 1999년 노자 강의 이후 14년이 흘러 2013 EBS는 인문학 특강시리즈로 최진석 선생의 현대 철학자, 노자라는 제목으로 도덕경 강의를 다시 한 번 내보냅니다. 이 강의에서 최진석 선생은 같은 본문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다.“

 

그런데 이 분의 강의가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그 이유는 이 구절의 번역의 결과에 촛점을 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고증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이 분의 오늘 구절에 대한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당시에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때 유가(공자)에서는 인도(人道)만이 가도(可道)’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반면 노자는 본문에서처럼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것이다.

 

(2)   그렇다면 이 문장은 공자와 노자의 논쟁처럼 읽어야 한다. , 노자가 공자에게 인도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결코 상도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며 결국 번역은 위와 같이 한 것이죠. ,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역사적 맥락과 언어적 용법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한 것이죠. (중국어는 시대마다 단어의 용례가 너무 달라서 시대서적을 읽을 때 쓰는 사전이 별도로 있을 정도라 오늘날의 한자 지식으로 읽으면 오독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도’라는 말은 현대에도 ‘말하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

 

이 분의 강의는 (다른 분들의 노자 강의가 본문의 번역과 해석,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철학을 설명하는데 집중하는데 비해) 도덕경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을 설명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아마 다 들으시면 우리가 지금껏 읽어왔던 유가와 도가의 사상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88J2EuczB4

https://www.youtube.com/watch?v=ObIo0Qskpt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