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三莫四 조삼모사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열자_황제편, 장자_제2편 제물론齊物論_제1장)
조삼모사라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보셨죠! 이 말은 (1) 어리석게도 눈앞에 보이는 차이에만 신경을 써 결과가 동일하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나 (2) 잔꾀를 부려 다른 이들을 농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는 고사는 열자에 나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송나라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원숭이를 사랑해서 (그것을) 길러 무리를 만들었고, 원숭이들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원숭이들 역시 저공의 마음을 알았다. 저공은 집안 식구들의 먹을 것을 줄여가면서 원숭이의 욕구를 채워 주었다. 그러나 얼마 후 먹이가 떨어져 (원숭이들에게 줄) 음식을 장차 줄여야만 하게 되었다. 원숭이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을 두려워해서 먼저 (원숭이들을)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에게 도토리를 이와 같이 주려고 한다.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면(朝三而暮四)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러 원숭이가 다 일어나서 화를 냈다. 저공이 얼마 뒤에 다시 말하기를 "너희들에게 도토리를 이와 같이 주려고 한다.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면 괜찮겠냐?’고 물으니 여러 원숭이가 다 엎드려 절하며 기뻐하였다.”
원문과 한자는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세요.
https://hm.cyberseodang.or.kr/verbalTrans/classic_view.asp?idx=13356&listLevel=2
한문독해첩경
※ 《원문고사성어(原文故事成語)》 검색 및 비교의 목적으로 원문(原文)만 제공됩니다. 우선 기초한문·사서 등 기본서부터 시작하여 각종 학습정보가 구축되고 있습니다. 이용권한이 없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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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m.cyberseodang.or.kr/verbalTrans/classic_view.asp?idx=13515&listLevel=2&moreViewType=
한문독해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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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자는 이 고사를 말한 후에 이런 설명을 덧붙입니다. “…성인은 지혜로 어리석은 군중들을 속이는데(덮어씌우는데), 역시 저공이 지혜로 원숭이들을 속이는 것과 같다. 이름과 실제를 훼손시키지 않고 그들을 기쁘게도 하고 노하게도 한다.” (…聖人以智籠群愚,亦猶狙公之以智籠眾狙也。名實不虧,使其喜怒哉!)
이렇게 본다면 열자의 ‘조삼모사’는 성인의 지혜로움에 대한 언급이라고 읽힙니다. 동양사상에 대한 대중적인 강연으로 유명세를 탔던 연세대 강신주 선생은 장자강의에서 ‘조삼모사’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조삼모사'라는 고사성어는 보통 굉장히 어리석은 사람을 지칭할 때 쓰이곤 합니다. 하지만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원숭이를 정말 좋아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안타깝게도 원숭이가 너무 많아져서 그가 원숭이들에게 줄 수 있는 도토리의 양은 하루에 일곱 개로 고정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 일곱 개를 가지고 계속 제안하면서 원숭이들과 합의점을 만들어갑니다. 노나라 임금은 자기 식으로 그냥 밀어붙였지만 원숭이 키우는 사람은 밀어붙이지 않아요. 차이는 거기에 있습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60457 재인용입니다.)
"조삼모사? 멍청한 원숭이 얘기가 아니랍니다"
[강신주의 철학 고전읽기 ⑥] 장자의 <장자>
www.ohmynews.com
이처럼 ‘조삼모사’를 ‘성인의 탁월한 처세술’로 해석한 것은 사실 장자가 아닌 열자의 맥락에서 가져온 것이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열자는 중국 전국시대(BC 475~221)의 사상가로 본명은 열어구(列禦寇)입니다. 노자, 장자와 더불어 중국 도가의 기본사상을 확립시킨 분으로 우리가 지금 인용한 ‘열자’라는 책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 포함된 많은 내용이 후대의 위작으로 밝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사마천은 심지어 자신이 쓴 ‘사기열전’에서 열자를 아예 빼버립니다. 나아가 열자라는 인물의 실존여부도 논란이 되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열자가 실존인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자, 그럼 장자는 이 내용을 어떻게 인용하고 있을까요? 한번 읽어볼게요.
“정신과 지성을 수고롭게 하여 하나로 만들려고만 하고 그 동일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조삼(朝三)이라 한다. 무엇을 조삼이라 하는가? 원숭이를 기르는 영감이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하니, 모든 원숭이들이 일제히 성을 냈다. 그래서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하니, 모든 원숭이들이 일제히 기뻐하였다. 이는 (조삼모사든 조사모삼이든) 이름과 실제가 다르지 않은데 기뻐하거나 성내는 반응은 다른 것은 역시 이로 인한 것이다(亦因是也, 역인시야. 상대적인 옳음을 따랐기 때문이다 혹은 주관적인 판단에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름을 조화시켜 하늘의 균등함에 (맡기고) 편안히 쉬니 이것을 양행(兩行)이라 한다.”
여기서 양행(兩行)이란 말은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두 가지를 다 행한다, 두 가지가 다 시행된다는 의미인데 맥락상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지하여 시비를 나누지 않고 하늘의 균등함을 따라 시비를 파악하기 때문에 ‘시’와 ‘비’가 모두 인정된다는 의미로, 모순이나 대립적인 사물이나 사태가 동시에 함께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경지를 말한다고 하네요.
동양고전 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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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서는 이 비유가 조금 더 철학적으로 들어갑니다. 장자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앞쪽에 나오는 내용부터 조금 길게 인용을 해 보면…
“물(物)에는 저것이 아닌 것이 없고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저것으로부터는 보지 못하고, 스스로 아는 것만 안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 때문에 생겨나고 이것은 저것 때문에 생겨난다. 곧 저것과 이것은 상대적으로 생겨난다는 설명이다. 비록 생(生)에 대립하여, 사(死)가 있고 사에 대립하여 생이 있으며, 가(可)에 대립하여 불가(不可)가 있고 불가에 대립하여 가가 있으며 시(是)에 기인하여 비(非)가 있고 비에 기인하여 시가 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이런 상대적 입장에서지 않고 천(天-자연)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이것이야말로 시(是-天)에 기인한 것이다. 이것이 곧 저것이요, 저것이 곧 이것이다. 저것에도 하나의 시(是)와 비(非)가 있고 이것에도 하나의 시와 비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저것과 이것은 없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을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을 도추(刀錐 : 도의 지도리, 도의 요체, 실재의 진상)라 한다. 문짝의 지도리(樞)는 고리 속에 끼워져야 무궁(無窮)에 응할 수가 있다. 시(是)는 또한 하나의 무궁이요, 비(非)도 또한 하나의 무궁이다. 그러므로 ‘밝음으로써 비추어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중략)
그 분화하는 것은 그대로 생성하는 것이고 생성하는 것은 그대로 허물어지는 것이다. 대체로 만물은 생성도 허물어짐도 없이 다시 통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인데 오직 도에 통달한 자라야 통합되어 하나가 되는 줄을 안다. 그러므로 도에 통달한 사람은 지혜의 분별을 버리고 일체를 용(庸-자연)에다 맡긴다. 용은 용(用)이요, 용은 통(通)이며, 통은 득(得)이다. 득하면 도에 가깝다. 오직 따를 뿐 그런 까닭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도(道)라 한다...” (이석호 역)
“각종 사물은 자신과 대립되는 저런 면이 없는 것이 없고, 또 각종 사물은 자신과 대립되는 이런 면이 없는 것도 없다. 사물의 상대적인 저 면에서는 이 면을 볼 수 없고, 저 면과 대립되는 이 면에서 보아야만 저 면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옛말에는 ‘사물의 저 면은 이 면에서 나오고, 사물의 이 면이 생겨난 원인은 저 면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물의 대립되는 두 면은 사호 양립하며 상호 의존한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막 태어난 것은 곧바로 죽고, 막 죽었던 것도 곧바로 부활할 수 있다. 막 긍정했던 것도 곧바로 부정하고, 막 부정했던 것도 곧바로 긍정할 수 있다. 올바른 한 면을 따르는 동시에 잘못된 일면을 따르기도 하고, 잘못된 일면을 따랐다가도 올바른 일면을 따를 수 있다. 그래서 성인은 정확함과 오류, 옳음과 그름의 길을 가지 않고, 사물의 본연을 관찰하고 비교한다. 사물의 이 면이 바로 사물의 저 면이 되고, 사물의 저 면이 바로 사물의 이 면이 된다. 사물의 저 면에도 옳음과 그름이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사물의 이 면에서 정확함과 오류가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사물은 진정 이런 면과 저런 면이란 두 면의 구분이 존재하는 것일까? 사물은 진정 이런 면과 저런 면이란 두 면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 면과 저 면에 모두 상대적인 일면이 없는 상태, 이것을 위대한 도의 중추라고 한다. 위대한 도의 중추를 파악한다는 것은 곧 사물의 요해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물의 무궁한 변화에 따를 수 있다. ‘옳음’ 역시 무궁한 것이고 ‘그름’ 역시 무궁한 것이다. 그래서 ‘사물의 본질을 관찰해 지혜롭게 분별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는 것이다.
(중략)
오래된 사물은 나누어지고, 이것은 바로 새로운 사물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사물이 형성되면, 이것은 바로 옛 사물의 파괴로 이어진다. 모든 사물은 형성과 파괴에 구별이 전혀 없으며, 이 둘은 서로 통하며 하나가 되는 특징을 갖는다. 오로지 통달한 사람만이 만물이 통해 하나가 되는 도리를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사물에 대해 고집스럽게 이런 저런 해석을 적용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관점을 일상적인 사물의 이치에 맡긴다…”
라고 하네요. 자연의 세계가 이런 것이 한 쪽 측면에서만 보지 말고 다른 면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된다면 사물의 모순 그대로 받아들여 모순이라고 느끼지 않게 될 것이라는 깨달음의 세계에서 노니는 사람들이나 주고 받을 수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태극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조금 수월할 것 같습니다. 음이 쇠하며 양이 성하고 양이 쇠하면 음이 성하며 계속해서 돌아가니, 이것이라 하는 순간 저것이 되고, 저것이라고 하는 순간 이것이 되어 버리죠. 게다가 가장 음이 성한 순간 한 가운데 양이 자리하고, 양이 가장 성한 순간에 음이 그 한가운데 자리하죠.)
다시 강신주 선생의 풀이로 돌아와서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과연 “장자를 해석하며 열자의 맥락을 가져 온 것이 해석학적으로 옳은 것인가?”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앞서 다른 질문을 먼저 생각해 봐야 할 듯 합니다. “장자가 열자의 이야기를 다른 맥락으로 가져간 것은 과연 해석학 적으로 옳은 것인가?” 넷 중 하나일 텐데요. (1) 둘 다 틀림. (2) 둘 다 맞음. (3) 장자는 맞고 강신주는 틀림. (4) 강신주는 맞고 장자는 틀림. 개인적으로는 이 중에 일관성이 없는 뒤의 둘은 제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해석학적인 입장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틀리지는 않다’고 말씀드릴 수 있고 나아가 ‘조삼모사’에 대한 우리들의 해석의 폭을 넓혀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작품은 다른 작품들을 지시하며 지시연관관계를 확대해 나갑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확장되어 온 텍스트의 상호연관성이라는 그물 내에서 연결되는 모든 해석은 틀리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강신주 선생의 ‘조삼모사’에 대한 이해는 하나의 해석으로 충분히 자리매김을 할 수 있죠.
다만 하나의 해석이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독선적이며 심지어는 배타적인 해석이 되어 지배적인 위치를 갖게 된다면 그 해석은 순수한 문학적인 해석내지 비평이라는 영역을 벗어나 정치, 사회, 역사적 맥락에서의 적실성을 판단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개 이런 경우는 텍스트 자체의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맥락이라기 보다는 그 텍스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가 문제가 되는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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