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間楊州鶴無 세간양주학무
세상에 양주(楊州)의 학은 없다.
소동파는 ‘녹균헌 綠筠軒’에서 “대나무를 대하면서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했죠! 만약에 선비가 대나무만 보고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대나무만 보고 살았을 것 같은 선비, 우리에게는 ‘허생전’과 ‘열하일기’로 잘 알려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6) 이 자신의 제자였던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15)에게 보낸 짧은 편지와 그에 대한 답장을 하나 읽어보겠습니다. 초정의 답장에 “양주학”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거든요.
“진채(陳蔡) 땅에서 곤액이 심하니, 도를 행하느라 그런 것은 아닐세.
망령되이 누추한 골목에서 무슨 일로 즐거워하느냐고 묻던 일에 견주어 본다네.
이 무릎을 굽히지 않은지 오래 되고 보니, 어떤 좋은 벼슬도 나만은 못할 것일세.
내 급히 절하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이.
여기 또 호리병을 보내니 가득 담아 보내줌이 어떠하실까?”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厄甚陳蔡 非行道而爲然 액심진채 비행도이위연
妄擬陋巷 問所樂而何事 망의누항 문소락이하사
久此膝之不屈 奈好官之莫如 구차슬지불굴 내호관지막여
僕僕亟拜 多多益善 복복극배 다다익선
玆又送壺 滿送如何 자우송호 만송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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厄 액(액, 불행한 일) 甚 심(심하다; 지나치다)
陳 진(베풀다) 蔡 채(풀)
妄 망(망령되다; 허망하다) 擬 의(비기다; 비교하다)
陋 루, 누(더럽다; 천하다) 巷 항(거리; 문밖)
久 구(오래다; 옛날의) 膝 슬(무릎)
屈 굴(굽히다; 쇠퇴하다) 奈 내(어찌)
亟 극(빠르다; 긴급하다) 拜 배(절하다; 빼다; 뽑다)
玆 자(이, 이에; 여기) 현(검다) 又 우(또; 다시)
送 송(보내다; 전달하다) 壺 호(호리병; 술병)
滿 만(차다;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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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요? 한 번 짐작해 보세요. 알듯 말 듯 하신가요? 그렇다면 박세당의 답장을 보면서 내용을 추론해 보죠.
열흘 장마비에 밥 싸들고 찾아가는 벗이 못됨을 부끄러워합니다.
공방(孔方) 이 백을 편지 전하는 하인 편에 보냅니다.
호리병 속의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 양주(楊州)의 학은 없는 법이지요.
十日霖雨 愧非飯之朋 십일림우 괴비반지붕
二白孔方 爰付傳書之僕 이백공방 원부전서지복
壺中從事烏有 世間楊州鶴無 호중종사오유 세간양주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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霖 림, 임(장마) 愧 괴(부끄럽다)
飯 반(밥) 孔 공(구멍)
爰 원(이에; 곧) 付 부(주다; 맡기다)
傳 전(전하다; 널리 퍼뜨리다) 僕 복(종; 마부)
烏 오(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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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에 대한 해설은 정민 선생의 글로 대신하겠습니다. 이 글은 정민 선생이 쓴 또 다른 책 “미쳐야 미친다”(서울: 푸른역사, 2004), 2장 “맛난 만남”에 실린 여섯 번째 이야기로 제목은…
“돈 좀 꿔주게”입니다. 이하는 정민 선생의 글입니다.
“누구나 인터넷을 쓰고 핸드폰을 지닌 세상에서 편지의 의미는 날로 빛이 바래간다. 주고받는 연하장의 수도 해마다 줄어든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습관처럼 메일 함을 열어보고, 문자를 날린다. 그런데도 속은 차지 않고 허전하기만 하다. 사람과의 만남은 겉돌기만 하고, 저마다 꿍꿍이속은 내보이질 않아 좀체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의 편지글을 볼 때마다, 과연 물질 환경의 발전이 삶의 질까지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일까 하는 회의를 지울 수 없다. 물질의 삶은 궁핍했으되, 정신의 삶은 보석처럼 빛났던 선인들의 자취를 그들이 남긴 짧은 편지를 통해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척독(尺牘)은 지금으로 치면 엽서 쯤에 해당하는 짧막한 편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문집에는 수십 통의 척독이 긴 편지글인 서(書)와 구분하여 따로 실려 있다. 18세기에는 이 척독소품이 성행했다. 짧은 글 속에 두 사람만이 아는 암호를 감춰 마음을 주고받는 널찍한 통로들을 만들었던 셈이다.
척독은 결코 시간이 없어 짧게 쓴 것이 아니다. 긴 편지를 쓰는 것 이상으로 애를 써서 작품성을 의식하고 제작된 글이다. 척독을 읽고 나면 정경이 떠오르고, 그림이 그려진다. 절제된 비유와 간결한 표현, 말할 듯 하지 않고 머금는 여백의 미를 추구한다. 척독은 산문보다 오히려 시에 가깝다.
진채(陳蔡) 땅에서 곤액이 심하니, 도를 행하느라 그런 것은 아닐세. 망녕되이 누추한 골목에서 무슨 일로 즐거워하느냐고 묻던 일에 견주어 본다네. 이 무릎을 굽히지 않은지 오래 되고 보니, 어떤 좋은 벼슬도 나만은 못할 것일세. 내 급히 절하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이. 여기 또 호리병을 보내니 가득 담아 보내줌이 어떠하실까?
〈기초정(寄楚亭)〉, 즉 박제가(朴齊家)에게 보낸 박지원의 짧은 편지다. 언뜻 보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예전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진채 땅에서 7일간이나 밥을 지어 먹지 못하고 고생한 일을 있다. 그러니 진채 땅의 곤액이란 자기가 벌써 여러 날을 굶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안회(顔回)처럼 가난한 삶을 즐기겠노라고 다짐하면서, 벼슬하지 않아 무릎 굽힐 일 없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보니, 이대로 굶어 죽을 수는 없고 돈 좀 꿔 달란 소리다. 궁한 소리를 꺼낸 김에 염치도 없이 빈 술병까지 딸려 보냈다. 이왕이면 술까지 가득 담아 보내달란 뜻이다. 그런데 막상 돈 꿔달라는 편지에 돈이란 말은 보이지 않는다. 원문으로는 고작 48자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글이다. 위 편지를 받고 박제가가 보낸 답장은 이렇다.
열흘 장마비에 밥 싸들고 찾아가는 벗이 못됨을 부끄러워합니다. 공방(孔方) 2백을 편지 전하는 하인 편에 보냅니다. 호리병 속의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 양주(楊州)의 학은 없는 법이지요.
그 역시 돈이라고 말하지 않고 공방(孔方)이라고 했다. 공방은 구멍[孔]이 네모[方]나다는 뜻이다. 동전 속에 네모난 구멍이 있기에 이렇게 말했다. 직접 먹을 것을 싸들고 가서 뵈어야 하는데 그저 동전 200냥을 인편에 부쳐 미안하다고 했다. 호리병 속의 일이 없다 한 것은 술은 못 부친다는 말이다. 술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여러 날 빈 속에 술을 마셔 좋은 것이 없었겠기에 한 말이다.
끝에 붙인 양주학(楊州鶴)은 고사가 있다. 여러 사람이 모여 각자의 소원을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은 양주자사(楊洲刺史)가 되고 싶다고 하고,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자도 있었다. 학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날고 싶다고도 했다. 맨 마지막 사람이 말했다. “나는 말일세. 허리에 십만 관의 돈을 두르고 학을 타고서 양주로 가서 자사가 되고 싶네.” 그러니까 양주학이란 말은 이것저것 좋은 것을 한꺼번에 다 누린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양주학이 없다고 한 것은 밥과 술을 다는 못 보내니 그리 알라는 뜻이다.
꿔달라는 사람이나 꿔주는 사람이나 피차 구김살이 없다. 평소 깊은 정을 나누지 않고 주고받을 수 있는 편지가 아니다. 평소의 깊은 정과 든든한 신뢰가 깔려 있다.”
훈훈한 내용이죠? 이 편지에서 초정은 ‘양주학’이라는 말을 두 가지 좋은 것을 가질 수는 없으니 한 가지만 보낸다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사실 못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안 보낸 것이라는 점에서 초청의 연암에 대한 배려가 돋보이고, 또 ‘건강을 생각해야지 무슨 술이냐’고 지적하지 않고 ‘양주학’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술을 호리병 가득 담아 보내주기를 원했던 연암으로 하여금 덜 무안하게 만들어줍니다. 오간 편지를 통해 연암과 초정이 의사를 소통한 방식에서 참으로 품격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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